남부지원 류영재 판사(시각디자인 01학번), “나에게는 사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입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나에게는 사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입니다”
남부지원 류영재 판사(시각디자인 01학번)
만화가의 꿈을 품었던 시절 그리고 흔들렸던 꿈
어려서부터 그림과 소설을 무척 좋아해 화가나 소설가를 꿈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만화책을 접하게 됐는데 글과 그림을 한 지면에 나타낼 수 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로 만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그 시기에 감명 깊게 봤던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어린 마음에 외고에 진학하면 영화에 등장했던 한 장면처럼 철학에 대해 논하고 토론하는 교육의 장이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시험 몇 달을 앞두고 영어 문제집을 풀며 외고 입시를 준비했고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사람들은 제 이력을 보고는 제가 엄청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오해가 있어요. 제가 입학할 당시엔 서울대 입학을 위해 외고를 자퇴하는 학생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외고 입시 경쟁률이 낮았죠”
하지만 막상 외고에 입학하고 보니 ‘죽은 시인의 사회’는 웬걸. 대학 입시 경쟁이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방황했었던 것 같아요. 눈앞에 닥쳤던 상황이 내가 꿈꿨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그림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고 고2때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바꿨어요”
대학 원서를 낼 당시 예술대와 조형대의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그녀는 미술학원에서 권유해준 대로 시각디자인학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1년, 우리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을 떠올리면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단 하나. 야간작업, 일명 ‘야작’이었다.
“저는 대학생 시절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밤을 새거나, 학교 근처 친구 집에서 잠을 자거나. 같이 밤새는 친구들과 야식 시켜먹고 동트는 걸 보면서 귀가해 씻고 쪽잠자고 다시 등교하는.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아요. 열정적이다가도 고달프고, 행복했다가도 다시 힘들고. 전형적인 20대 대학생이었죠”
그러나 그녀가 대학교 1학년이던 해, 존경했던 만화가 몇 분이 급작스럽게 절필선언을 했고 이를 계기로 만화가의 꿈을 접었다. 대신 그녀는 전공이었던 디자인에 더 매진하기로 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학교를 휴학하고 제일기획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해보기도 했다. 졸업할 즈음에는 이미 인사가 내정됐던 디자인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디자인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제 성격상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24시간이고 몰두해서 집중을 하는 편인데 디자인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죠. 방학기간 2달 동안은 디자인을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또 제가 작업을 하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 대해서 남들은 비판하고 제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작업들에 대해서 남들은 칭찬했을 때 ‘디자인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죠”
법을 전혀 몰랐던 디자인학과 졸업생, 사법시험에 도전하다
고심 끝에 졸업 후 디자인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지만 예체능계에 있던 사람이 일반 회사에 취직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삼성에 원서를 내보기도 했으나 2차 면접전형에서 탈락했다. 앞이 캄캄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진 그녀에게 법대를 졸업했던 아버지가 사업시험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길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는 헌법만 있는 줄 알았어요. 1조부터 한 1000조 정도까지? 하나의 법전에 모든 것이 다 적혀있는 줄 알았죠”
법에 대해 무지했던 그녀였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법에 빠져들었다.
“법은 나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닌 나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 법에 의해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런 법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스스로법에 점점 매료되고 있음을 느꼈죠”
사법시험을 준비한 지 1년이 흐른 후, 첫 1차 시험을 치렀다.
“선택과목으로 국제법을 선택했는데 필수과목이었던 헌법과 같이 1교시에 시험을 봤죠. 도중에 실수를 해 답안지를 교체했는데 시험 종료 3분이 돼서야 헌법과 국제법 답안지에 마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시간 분배에 착오가 생겼던 겁니다. 남은 시간 동안 헌법을 마킹했고 국제법은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음 2, 3교시 시험을 엉엉 울면서 치렀습니다”
결국 필수과목 3과목은 합격점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과목이 0점이 나오는 바람에 그 해 1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슬럼프로 이어졌다. 불합격한 이유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슬럼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을 다잡은 그녀는 결국 다음해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사법시험을 준비한지 3년 차 되던 해 사업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합격자가 된 그녀는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저는 같은 시험을 치는 수험생들을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제쳐야 한다’라는 상대적인 기준보다는 ‘아는 것은 절대 틀리지 말자’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시험을 치는 것이 심적으로 편하더라고요”
그녀의 오픈 마인드 덕이었을까. 그녀는 연수원 졸업 당시, 10등 안에 들어야만 받을 수 있는 ‘사법연수원 상’을 받았다. 또한 사법연수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법관에 임용됐다.
법관이 되다
“판례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좋았어요. 사익은 별개로 두고 오로지 공익만을 고민해도 되는 어떤 결론이 올바른 결론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전부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어요”
법관 3년 차인 그녀는 서울 중앙지방법원 민사부 판사에 이어 올해부터 서울 남부지방법원 형사부 판사로 근무 중이다.
“판결을 통해 규범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측면을 더 고려해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하게 돼요. ‘나에게는 사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고민합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꿈을 꾸기도 하지요. 이런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참 보람되고 항상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녀에겐 기억에 남는 판결이 있다. ‘이천 창고 화재사건’도 그 중 하나.
“일용직 인부들이 창고에 불을 붙였는데 불이 붙은 지 1~2분 만에 창고가 전소돼버린 사건이었죠. 보통 창고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낸 사람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게 하죠. 하지만 이 사건은 불이 붙은 후 삽시간에 전소 돼버린 상황이라 혹시 창고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됐어요. 실제 조사해 보니 창고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답니다. 때문에 창고를 관리하는 소유주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무는 판결을 내렸죠”
기존대로 ‘당연한’ 판결이 아닌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책임을 공평하게 분배한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재판을 하고 더 많은 선고를 내릴 그녀. 그녀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항상 고민하는 진정성 있는 법관이 되기를 꿈꾼다.
“재판의 의미, 판사의 역할, 법치주의의 실현, 규범의 정립과 당사자들의 만족 등의 문제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판사가 되고 싶어요”
글/ 국민대신문사 김지은(법 12학번) 기자
사진/ 국민대신문사 장유경(교육 13학번)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