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명의 유래
해공은 ‘以校爲家(이교위가)’를 교훈으로 하여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극복하는 국민대학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이 때 이교위가의 ‘家’는 단순한 의미에서 ‘집·가정’의 뜻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국가’도 뜻한다.
미군정에 의해 설립되는 국립서울대학교와 쌍벽을 이루는 민족대학으로서 세워지는 대학의 명칭이 ‘국민대학’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즉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주체는 미군정이며, 민족대학의 설립주체는 임시정부계열의 인사이기에 대학의 명칭은 당연히 민족의 대학이며, 국민의 대학인 ‘국민대학’이 되었던 것이다.
개교일에 대한 이해
국민대학이 미군정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은 것은 1946년 12월 18일이고, 학생모집 통한 개학식과 정상수업이 이루어진날은 인가일보다 훨씬 빠른 1946년 9월1일이었다. 여기에서 개교기념일에 대한 오해가 비롯되는데 그동안 인가일을 개교기념일로 기념 하였으나 1996년도에 이를 바로 잡을수 있었다. (자료: 국민대학50년사)
1946년 9월 1일은 국민대학과 국립서울대학교가 동시에 개교하였다. 국민대학은 신익희 재단이사장이 학장을 겸임하였고, 서울대학교는 헤리.비.엔스테드 미군대위가 총장을 맡았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군정청에서는 국민대학의 인가를 늦추다가 당시 학원을 휩쓸고 있던 국대안반대운동이 고개를 숙인 그 해 말 12월 18일에 인가를 내주었다.
이리하여 개교일과 설립인가일은 그 성격도 다르고, 더구나 인가는 군정청에서 의도적으로 늦춘 것이므로 실제의 개교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교기념일 행사는 10월 18일에 하더라도 개교일은 9월1일 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해공 선생의 장학이념
국민대학교는 8.15해방과 더불어 중국 상해임시 정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 하다가환국한 해공 신익희선생이 1946년 9월1일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민족의 대학으로 설립할 계획에 의하여 창설된 광복후 최초의 사립대학교이다.
해공선생은 스스로 초대학장에 취임하여 以校爲家와 事必歸正을 교훈으로 삼고 대학발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며 1948년 8월에 주간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였다.
해공 선생의 발자취
- 1894. 7. 11경기도 광주군 초원면 서하리(사마루 67) 출생
- 1916년일본 조도전 대학 정경학부 졸업
- 1917년서울 중동중학교 교유
- 1918년보성법률상업학교(고대전신) 교수
- 1919년중국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차장 / 법제분과위원장 및 대한민국임시헌장 기초위원
- 1920년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 외무부장 직무대리 및 국무원 비서실장
- 1921년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 총장, 문교부장, / 외무부장 의정원 부장
- 1923년중국군 육군중장으로 항일전 참전.
- 1925년중국군 장성 신분으로 한 중 합작 추진
- 1929년한국혁명당 조직
- 1933년김규식, 김원봉 등과 대일전선 통일연맹 결성
- 1935년중국과 미주지역의 난립된 정당(5개)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 조직
- 1944년좌, 우 합작 연립내각의 내무부장에 취임
- 1945년민족해방을 맞아 12월 1일 임정요인 제2진으로 27년만에 조국으로 환국
- 1946년남조선 과도입법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및 자유신문 사장, / 국민대학 창립(1946. 9. 1)
- 1947년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피선
- 1948년제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광주군에서 무투표 당선,
- 1948년-5월 31일 국회부의장, 8월 4일 국회의장에 피선.
- 1950년제2대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명의장 명사회자로 명성을 드높였으며,
- 1948년-국회방미사절단장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국위를 선양함.
- 1952년6.25사변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제2대 국회 후기의장에 피선
- 1953년영국 엘리자베스여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26개국 순방외교를 통하여 국위를 선양함
- 1954년소위 4사5입 파동으로 호헌동지회 결성
- 1955년재야정치연합전선으로 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 1956. 5. 5민주당 대통령후보에 피선되어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5월 5일 서거.
성곡의 육영이념
실업가이자 정치가였던 성곡은 1959년 국민대학교의 재단을 인수하여
재단법인 국민학원의 이사장 이사를 역임하며 재단의 실질적인 대표로서 그의
육영이념을 구현하려 하였다.
해공의 서거 후 국민대학교가 재단을 확보하지 못해 침체의 늪에 빠졌을 때,
국민대학교를 인수해 중흥의 닻을 올렸다.
일본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민족해방과 해방 후 새로운 국가 발전이라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성곡은 해방 후 최초의 사학인 국민대학교 재단을
인수함으로써 성곡의 육영이념은 해공의 건학이념과 맥을 같이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중견국민을 양성하고 대학교육을 보편화하며 구국정신을
계승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국민대학교가 중흥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성곡 선생의 발자취
- 1913. 8. 15(음력 7월 14일)경북 달성군 현풍면 출생
- 1931년대구고보 4학년때 항일 스트라이크 주동으로 퇴학
- 1932년서울 보성고보 4학년에 편입
- 1937년보성전문(고대 전신) 상과 졸업
- 1939년삼공합자회사(비누공장) 설립
- 1948년금성방직주식회사 설립
- 1953년동양통신 인수, 사장 취임
- 1954년연합신문 인수, 사장 발행인 취임
- 1958년제4대 국회의원 당선(경북 달성)
- 1959년국민학원(국민대학) 인수, 재단이사장 취임.
- 1960년대한 유도회 제 3대 회장 피선
- 1961년IPI 정회원 가입 -1961년 IPI 본부이사 피선
- 1962년쌍용양회공업주식회사 설립
- 1963년제6대 국회의원 당선 - 국회재정경제위원장 피선
- 1965년성곡언론문화재단 설립
- 1967년제 7대 국회의원 당선
- 1968년성곡학술문회재단 설립
- 1968년한일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 간사
- 1970년고려대학교 교우회장 피선
- 1971년제 8대 국회의원 '10.2 항명' 파동으로 국회의원직, 공화당 사퇴, 정계은퇴
- 1973년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피선 1974년 쌍용그룹 기업공개 발표
- 1975. 2. 25향년 62세로 별세
- 1975. 2. 26국민훈장 문화훈장 추서